170802 <비너스 인 퍼> 8pm
캐스트: 방진의 이도엽
1. 너무 궁금해서 원작까지 읽고 기다리던 극이었는데 결과적으로는 탁월한 선택이었다. 기대 그 이상이었음! 표 더 잡아놨는데 거기서 더 잡고 싶다. 너무 즐거웠고 내가 원작을 읽으면서 내내 하고 싶었던 얘기가 이거라고 외치고 싶던 극.
2. 일단 여성을 남성이 어떻게 바라보는지, 그리고 실제 여성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그것을 이 극이 보여주는 방식 자체가 너무 좋았다. 이 둘의 주도권 싸움도 재밌지만 결국 극이 얘기하고자 하는 그런 얘기들이 참 재밌었다.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 장면은 충격적이라고 할 만큼 좋았는뎈ㅋㅋㅋ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는 토마스와 경멸하듯이 보고 있던 벤다가 참 기억에 남을 거 같음.
제일 좋았던 장면은 토마스가 '벤다' 역할을 할 때였다. 그 토마스의 표정이 참 우스꽝스럽다는 생각을 했음. 본인이 만든 여캐(또는 여성)에 취한 남류작가를 이런 맥락에서 보는 건 상상 그 이상으로 유쾌해서 소름이 끼치는 동시에 크게 웃고 싶었음.
또 주도권이 뒤집힌 다음 벤다는 단 한 번도 지배자의 위치에서 내려가지 않는 것도 너무 좋았고. 끝까지 위에 올라서서 끝난다는 게 얼마나 좋았는지.
텍스트를 하나하나 보고 싶었고 대본집 내주면 얼마든지 살 의향 있다. 기대했던 게 있었고 기대 그 이상을 보여준 극은 간만이라 좀 흥분해서 본 거 같다.
3. 개인적으로 거울을 사용하는 연출이 너무 취향이었음. 중간 중간 토마스가 거울 속 본인 모습을 보는 타이밍이 기막히게 좋았던 거 같다.
무대를 양옆으로 길게 만들어 놓은 것도 참 좋았고. 어딜 앉아도 목이 아프다는 단점이 있겠지만ㅋㅋㅋ 벤다가 무대 휘젓고 다닐 때 정말 런웨이 보는 기분이고<
극중극과 극 중 현실의 경계가 무너지기 시작하는 순간도 너무너무 좋았다. 전화하라고 시키는 거 정말 소름 끼쳤음. 뒤로 갈수록 어디까지가 극중극인지 구별이 잘 안 가는데 그게 참 자연스럽게 스며들어있어서 좋았던 거 같다.
다만 음악 깔리는 게 너무 작위적으로 느껴져서 그거 하난 취향이 아닌 거 같다.
아 그리고 가끔 번역한 대사들이 좀 어색해서 더 자연스럽게 다듬었으면 좋겠음. 프로그램대로 조종한다는 대사가 제일 그랬던 거 같다.
기둥도 사실 왜 있나 좀 의아했는데 벤다가 아예 "남근의 상징인가?"하는 대사를 던지고 그걸 뒤집는 상황을 보여줘서 빠른 스피드로 납득함.
그 부분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상징들이 상징하는 게 바뀌게 되는 상황들이 참 좋았다.
4. 진의배우를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는데 초반에는 좀 집중 못하다가 중반부터 미쳤다 미쳤어를 외치며 사랑한다고 플랜카드 들고 싶어졌다. 기대했던 만큼의 느낌을 받고 왔음. 싸늘한 대사를 칠 때가 정말 좋았던 거 같음. 무대를 잡아먹는 순간들이 너무너무 멋있었다.
도엽배우도 처음 본 배우였는데 중간에 딕션이 좀 뭉개지는 때가 있어서 살짝... 그래도 연기 나랑 잘 맞았고 특히 막판에 '벤다' 연기할 때 표정이 너무 좋았어서 전체적으로 너무 잘 봤다.
5. 여기서부턴 원작 <모피를 입은 비너스>를 본 자의 사족. 이 책은 성별에 대해 좀 앞서 나간... 부분이 없잖아 있다고 생각은 하지만 결론적으로는 고정관념에 찌든 책이라고 생각했다.
여성은 감정적이고 남성은 이성적이라는 틀을 그대로 가져가고 여성이 도덕적 잣대 아래 갇힌 존재라고 얘기하는 듯 싶더니 결국 '정상'적인 여성은 기독교적 윤리를 따르는 여성이라는 얘기를 하지 않나 주인공이 정신을 차렸다며 하는 행동은 여성에게 윽박지르고 폭력을 가하는 건데 이 책이 어딜 봐서 페미니즘...ㅋㅋㅋ
시사하는 바가 없었다고 하진 않겠지만 이 책이 성별과 권력에 대해 차별 없이 그려냈다고 하면 좀.
아무튼 그래서 책을 읽고 극도 그런 식으로 흘러가면 어쩌나 엄청 많이 걱정을 했다. 그러나 이 극은 오히려 내가 책을 보며 생각했던 그 이상으로 책의 문제점을 짚어주고 있었다. 내가 논리정연하게 정리하지 못한 부분을 명확하게 보여주기도 하고, 아예 원작을 뒤집는 것도 즐거웠고.
특히 극중극에서 비너스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 같은 경우 원작이랑 완전히 달라서 너무 좋았닼ㅋㅋㅋ
원작을 모르고 봐도 하등 상관없지만 책을 읽으니 좀 더 따라가기 편하고 재미가 늘어나는 면이 있음. 이게 잘 만든 극이겠지.
여기저기 추천하고 다닐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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